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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밀로 시엔푸에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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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밀로 시엔푸에고스는 쿠바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1932년 아바나에서 태어났다. 그는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와 함께 쿠바 혁명에 참여하여 야과하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야과하이의 영웅'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혁명 이후 혁명군 최고 사령관을 역임하며 반혁명적인 폭동과 토지 개혁에 기여했다. 1959년 10월 28일, 아바나로 향하던 중 비행기 사고로 실종되었으며, 그의 죽음에는 여러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는 혁명 순교자로 추앙받으며, 쿠바에서 기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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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밀로 시엔푸에고스
기본 정보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턱수염과 스테트슨 모자를 쓰고 웃고 있는 모습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 1959)
본명카밀로 시엔푸에고스 고리아란
로마자 표기법Kamillo Sienpwegoseu Goriahllan
출생일1932년 2월 6일
출생지아바나, 쿠바
사망일1959년 10월 28일 (실종)
사망 장소플로리다 해협 (추정)
사망 원인항공 사고 (추정)
안장 장소북대서양 (추정)
국적쿠바
별칭야과하이의 영웅
형제자매오스마니 시엔푸에고스 (형제)
학력산 알레한드로 국립 미술 아카데미
군사 복무
소속쿠바 혁명군
계급소령
전투쿠바 혁명
그란마 호 상륙
베라노 작전
라스 비야스 작전
야과하이 전투
산타클라라 전투
정치 활동
소속 정당7월 26일 운동
직책혁명군 총사령관
임기 시작1959년 1월 3일
임기 종료1959년 10월 28일
대통령마누엘 우루티아 레오
총리피델 카스트로
기타
신념무정부주의

2. 생애

카밀로 시엔푸에고스는 에스파냐계 공화좌파 가정에서 자랐으며, 1953년 7월 피델 카스트로의 몬카타 병영 습격에 참가하였다. 이후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와 함께 쿠바 혁명에 참가하였고, 1958년 12월 30일 야과하이 전투에서 정부군을 격파하여 '''야과하이의 영웅'''이란 별명을 얻었다. 1959년 1월 3일, 쿠바 혁명무력을 이끌고 아바나에 입성하였다.[10] 혁명 후 군 장성으로 복무하며 농업개혁에도 영향을 미쳤으나, 1959년 10월 28일 카마궤이에서 아바나로 향하는 비행기에 탑승했다가 플로리다 해협 상공에서 실종되었다.[10]

2. 1. 초기 생애

1932년, 카밀로 시엔푸에고스는 쿠바로 이민 온 스페인 아나키스트 부모의 노동자 계급 가정에서 태어났다.[10] 그의 아버지 라몬 시엔푸에고스는 아바나에서 재봉사로 일하며 좌익 정치 활동에 참여했고, 국제 반파시스트 연대(Solidaridad Internacional Antifascista, SIA)와 쿠바 자유주의자 협회(Asociacíon Libertaria de Cuba, ALC)에서 활동했다. 카밀로가 아직 유아였을 때, 그의 아버지는 스페인 내전 중 공화파를 위해 자금을 모으기 위해 그를 데리고 다녔다.

카밀로의 형인 오스마니 시엔푸에고스는 건축가 학위를 받았고, 공산주의 활동가가 되었다. 당시 학생 반체제 인사들이 매우 활동적이었고, 반공주의적인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권에 의해 점점 더 탄압받고 있었다. 카밀로는 산 알레한드로 국립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조각을 공부했고, 1955년 12월, 당국에 의해 폭력적으로 해산된 일련의 학생 시위에 참여했다. 안토니오 마세오 기념비에 화환을 바친 후 대학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와 그의 동료 학생들은 경찰의 총격을 받고 부상을 입었다. 결국 그는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학교를 중퇴하고 아버지와 같은 의류 가게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잠시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한동안 불법으로 일하기도 했다. 1956년, 시엔푸에고스는 멕시코로 이주하여 쿠바로의 귀환을 위한 피델 카스트로의 7월 26일 운동에 합류했다.

1953년 몽카다 병영 습격에 참여했다.[10]

2. 2. 쿠바 혁명

에스파냐계 공화좌파 가정에서 자라났고, 1953년 7월 피델 카스트로의 몬카타 병영 습격에 참가하였다. 이후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와 함께 쿠바 혁명에 참가하였고, 1958년 12월 30일 야과하이 전투에서 정부군을 격파하여 '''야과하이의 영웅'''이란 별명을 얻었다. 1959년 1월 3일, 쿠바 혁명무력을 이끌고 아바나에 입성하였다. 혁명 후 군 장성으로 복무하며 농업개혁에도 영향을 미쳤으나, 혁명 승리 아홉 달 뒤인 1959년 10월 28일 카마궤이에서 아바나로 향하는 비행기에 탑승했다가 플로리다 해협 상공에서 실종되었다.[10]

총을 머리 위로 들고 바다를 헤쳐나가는 쿠바 게릴라들. 소형 보트에서 내린 모습.
그란마호 상륙 후 쿠바 게릴라들의 상륙


1956년 12월 2일 그란마호 상륙 이후, 7월 26일 운동은 시에라마에스트라 산맥으로 이동했고, 12월 5일 사탕수수밭에서 쿠바 국군의 매복 공격을 받았다. 많은 게릴라들이 사로잡히거나 사망했고,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쳐야 했다. 시엔푸에고스의 소규모 부대는 수일 동안 그 지역을 헤매다가 결국 현지 농민들로부터 카스트로의 위치를 알게 되었다. 그는 초기 원정대에서 살아남은 12명 중 한 명이었다.

국군을 기습하기 위한 준비 과정에서 시엔푸에고스는 쿠바 국군 장교로 위장한 체 게바라를 실수로 쏘일 뻔했다. 이 실수에도 불구하고 기습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현지 농민들의 지지를 얻으면서 반군의 수는 곧 증가했다. 신병들과의 관계는 처음에는 좋지 않았다. 베테랑들은 신병들의 경험 부족, 지식 부족, 적절한 장비 부족에 좌절했다. 이렇게 커진 혁명 무장 세력은 세 개의 중대로 나뉘었고, 시엔푸에고스는 소규모 특수 선봉대를 지휘했다. 또한 시엔푸에고스가 속한 내부 위원회의 지휘를 받았다. 피델 카스트로를 최고 사령관으로 하는 모든 혁명 무장 세력의 지휘관들은 소령 계급을 공유했다.

1957년 3월, 국군은 반군에 대한 반격을 개시하여 4월 초까지 승리를 선언했다. 몇 주 안에 반군은 현지 주민들의 지원을 받아 피코 투르키노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그들은 만연한 농민들의 영양실조와 질병을 치료하고, 토지 개혁을 실시하고,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대한 강좌를 개설했다. 1957년 5월까지 반군은 동쪽으로 진격하여 군대에 대한 또 다른 공격을 계획했다. 카스트로가 시엔푸에고스를 제2부대 사령관으로 임명한 후, 5월 28일 반군은 우베로 병영을 포위하고 공격을 시작했다. 일부 손실에도 불구하고 반군은 승리했고, 신속하게 병영을 약탈하여 보급품과 포로를 산으로 가져갔다.

쿠바 혁명 중인 체 게바라(Che Guevara)


반란이 본격화되면서 국군과 혁명군 모두 시에라마에스트라 산맥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강력한 국가 통제가 부재한 이 지역은 여러 무장 단체들의 폭력 행위로 혼란에 빠졌다. 반군 자신들도 행동 강령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체 게바라는 엄격한 규율을 준수했는데, 이는 반군 지휘관 랄로 사르디냐스가 불복종한 병사를 사살했을 때 신병들과의 마찰을 야기했다. 카스트로는 이를 징계 조치로 옹호하며 병사 대다수를 설득하여 사르디냐스의 강등에 찬성표를 얻었다. 그를 처형하기를 원했던 소수 의견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이후 반군을 떠났다.

사르디냐스는 지휘권을 박탈당했고, 그의 자리는 시엔푸에고스가 대신했다. 시엔푸에고스는 게바라의 선봉 소대대위가 되었다. 시엔푸에고스와 게바라의 지도 스타일은 상호 보완적이었다. "카밀로의 무모한 성격이 체의 엄격함을 상쇄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두 사람은 급속히 가까워졌다. 카스트로는 시엔푸에고스에게 혁명의 이름으로 폭력 행위를 저지른 "산적"들을 추격하고 제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들은 카라카스 산으로 가서 중국계 쿠바인 산적 두목 치노 창을 체포하여 혁명 재판으로 재판하고 처형했다. 창의 젊은 추종자 세 명은 모의 처형을 당했지만, 이후 혁명군에 합류하도록 초대받았다. 또한 혁명군으로부터 물건을 훔친 젊은 산적들과 게바라를 사칭한 강간범을 체포하여 처형했다. 카스트로는 처형 건수에 대해 질문을 받자 그 수를 축소하고 기록된 사례들을 정당화했다. 1957년 10월, 게바라가 후퇴하여 지역에 산업 기반 시설을 구축하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 게릴라전을 물적으로 지속할 수 있게 되었다. 곧 혁명군은 댐, 병원, 농장, 공장, 작업장을 갖춘 완벽한 반란군 경제를 엘 옴브리토에 구축했다.

쿠바혁명박물관에 전시된 시에라마에스트라에서 매복하는 시엔푸에고스(왼쪽)와 게바라(오른쪽)의 모습


다음 달, 그들은 안헬 산체스 모스케라가 인근 계곡을 통해 국군을 이끌고 그곳의 지역 농민들의 집을 파괴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엔푸에고스는 그들을 뒤에서 매복 공격하도록 파견되었지만, 교전은 빨리 끝났고 양측이 철수하기 전에 한 명의 국군 병사만 사망했다. 시엔푸에고스는 게바라의 부대에서 증원군을 기다리면서 국군 캠프 근처에 위치를 잡고 두 번째 공격을 시도했다. 11월 29일, 반군은 모든 탈출 경로를 차단하고 나무에 몸을 숨긴 채 매복을 설치했다. 대부분의 국군 병사들은 주둔하고 있던 농가에서 사살되었고, 게릴라 순찰대는 증원군의 도착을 막으려고 했다. 하루 종일 벌어진 치열한 전투 끝에 반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해야 했다.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산체스 모스케라의 부대가 그들을 추격했다.

다시 한번 매복을 설치하려고 시도했다. 시엔푸에고스는 나무 뒤에서 근접 거리에서 시작 사격을 하고, 그 후 부분적으로 은폐된 저격수들이 도로에 사격을 가할 예정이었다. 그 후 이어진 총격전에서 게바라가 발에 총상을 입고 소총을 잃어버렸고, 다시 후퇴해야 했다. 게바라는 카스트로에게 긴급 증원을 요청했지만, 국군이 이미 그 지역에서 철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 기뻐했고 발에 수술을 받은 후 엘 옴브리토에 있는 자신의 기지캠프로 돌아왔지만, 완전히 파괴된 것을 발견했다. 1958년 새해가 밝으면서 게바라의 부대는 라 메사에 새로운 기지캠프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1958년 2월, 게바라의 무기고는 그 해 반군의 첫 번째 공세인 피노 델 아구아의 국군 중대에 대한 공격을 위한 물자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2월 16일, 반군은 폭발물을 이용해 군 캠프를 공격하여 초소를 점령했다. 초기 반군의 성공 후, 국군 증원군이 도착했고, 시엔푸에고스는 기관총을 회수하려는 과정에서 두 번 총상을 입었다. 게바라의 지휘 아래 반군은 국군을 격퇴하려고 했지만, 부상당한 시엔푸에고스의 지원이 없었기에 결국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반군은 다시 언덕으로 후퇴하여 군에 대한 일련의 파괴 공격을 수행했다.

2. 3. 혁명 이후

에스파냐계 공화좌파 가정에서 자란 시엔푸에고스는 1953년 7월 피델 카스트로의 몬카타 병영 습격에 참가했다. 이후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와 함께 쿠바 혁명에 참가하였고, 1958년 12월 30일 야과하이 전투에서 정부군을 격파하여 '''야과하이의 영웅'''이란 별명을 얻었다. 1959년 1월 3일, 쿠바 혁명무력을 이끌고 아바나에 입성하였다.[10] 혁명 후 군 장성으로 복무하며 농업개혁에도 영향을 미쳤으나, 혁명 승리 아홉 달 뒤인 1959년 10월 28일 카마궤이에서 아바나로 향하는 비행기에 탑승했다가 플로리다 해협 상공에서 실종되었다.[10]

혁명 이후 대부분의 정당은 자발적으로 해산하여 "새로운 정치 질서"를 위한 길을 열고자 했다. 1959년 1월 10일, 시엔푸에고스는 인민사회당(PSP)을 합법화하며, "외세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 한 다른 모든 민주당과 마찬가지로 조직할 권리가 있다"고 선언했다. 체 게바라는 시엔푸에고스의 결정을 지지했으며, PSP가 정부에 참여하고 초기 운영을 돕기에 합당함을 증명했다고 생각했다. 한편, 카밀로는 그의 형제이자 PSP 회원인 오스마니 시엔푸에고스에게 쿠바 문맹퇴치 운동을 감독할 혁명무장군의 문화부를 설립하도록 요청했다. 훌리오 가르시아 에스피노사에 따르면, 시엔푸에고스는 전쟁에서 싸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PSP 회원 여러 명을 장교로 임명하기도 했다. 시엔푸에고스는 7월 26일 운동과 인민사회당 간의 두 조직을 합병하기 위한 회담에도 참여했다.

혁명 승리 후, 시엔푸에고스는 정부 내 공식 직책을 맡지 않았다. 대신 아바나의 야간 유흥을 즐기고 클럽에 다니며 "대중의 총아"로서의 지위를 만끽했다. 1959년 2월, 시엔푸에고스는 체 게바라를 놀라게 하며 그의 가족이 아르헨티나에서 그를 만나러 올 수 있도록 무료 항공편을 마련했다. 이는 게바라의 자기 규율적인 금욕주의 때문에 허락받지 못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게바라가 6월 2일에 알레이다 마르치와 결혼했을 때, 시엔푸에고스는 결혼 피로연을 "활기차게" 만들기 위해 럼주 병을 가지고 왔다. 결혼식 직후, 게바라는 이집트로 가서 반둥 회의의 국가 대표들과 만났다. 게바라가 자리를 비운 동안, 그의 부하들은 카스트로가 그를 제거했을 것이라고 걱정하기 시작했고, 인기 없는 사령관이 그의 대체자로 임명되었을 때 시엔푸에고스에게 항의했다. 그러나 시엔푸에고스는 그들의 불만에 흔들리지 않았고 명령을 따르지 않은 병사들을 질책했다.

Camilo Cienfuegos and Fidel Castro dressed in their baseball uniforms
시엔푸에고스(왼쪽)와 피델 카스트로(오른쪽), 하바나에서 야구 경기를 하러 온 모습


혁명을 시작했던 몬카다 병영 공격 기념일에 혁명 정부는 미사에 참석하여 혁명 중에 사망한 사람들을 기념하고, 혁명 광장에서 대규모 시위를 주관한 후 군사 퍼레이드를 거행했다. 그날 밤, 그들은 라티노아메리카노 경기장에서 "로스 바르부도스"(Los Barbudos|수염 난 사람들es)라는 팀으로 시엔푸에고스와 카스트로가 경기를 치렀다. 야구는 혁명 이후 쿠바 문화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고, 미국 대사 필립 본살은 "총리(그의 숭배자들은 그가 유망한 메이저리그 투수였다고 주장한다)가 전 마이너리거인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중령에게 몇 개의 커브를 던지고 다이아몬드에서 장난을 치는 광경은 많은 중요한 경기의 사전 경기 쇼의 특징이었다"라고 말했다.

혁명 초기, 시엔푸에고스는 화가를 지망했으나, 1953년 몽카다 병영 습격에 참여했고, 혁명 기간 동안 체 게바라와 함께 반군을 이끌었다. 혁명 승리 후 군 최고 사령관에 취임하여 반혁명적인 폭동과 싸우고 토지 개혁 실시에 대규모로 관여했다.

시엔푸에고스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무정부주의자였다. 또한 혁명 기간 동안 그가 이끈 군대도 공산주의가 아니었다. 하지만 특히 체 게바라에게 존경받았으며, 게바라 자신은 자신의 아들(장남)에게 "카밀로"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1959년 10월 28일, 시엔푸에고스는 세스나 추락 사고로 사망했는데, 이는 악천후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미국의 쿠바 반정부 세력 내에서는 "카스트로가 시엔푸에고스의 비행기를 공군의 미그 전투기에 의해 격추하도록 명령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사고 당일 밤 날씨는 맑았다고 한다. 쿠바 공군 소령 로베르토 카르데나스에 따르면, 시엔푸에고스는 쿠바의 소련화에 반대했던 지휘관 후베르 메토스의 처형을 거부했기 때문에 격추되었다고 한다. 피델 카스트로는 이러한 주장을 부인하고 있다.

2. 4. 죽음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와 함께 쿠바 혁명의 영웅으로 불리는 카밀로 시엔푸에고스는[10] 1959년 10월 28일 카마궤이에서 아바나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했다가 플로리다 해협 상공에서 실종되었다.[10]

시엔푸에고스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악천후로 인한 추락 사고라는 설이 일반적이지만, 미국의 쿠바 반정부 세력은 카스트로가 시엔푸에고스의 비행기를 격추하도록 명령했다고 주장하며, 사고 당일 밤 날씨가 맑았다고 한다. 쿠바 공군 소령 로베르토 카르데나스는 시엔푸에고스가 쿠바의 소련화에 반대했던 지휘관 후베르 메토스의 처형을 거부했기 때문에 격추되었다고 주장했지만, 피델 카스트로는 이를 부인하고 있다.

3. 사상

카밀로 시엔푸에고스는 정치 이데올로기에 공개적으로 헌신하지 않았고, 피델 카스트로에게 개인적으로 충성했지만 강력한 정치적 신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1] 파버는 그가 "카스트로 형제뿐만 아니라 체 게바라보다 정치적으로 덜 세련되었다"고 언급했다.[2] 시엔푸에고스 자신은 쿠바 혁명을 반권위주의적이고 "비공산주의적"이라고 생각했으며, 카스트로의 입장이 바뀐 후에도 이러한 견해를 계속 반복했다. 시엔푸에고스에게 혁명은 "''쿠바니시마'' [극도로 쿠바적인] [...] 야자수만큼 쿠바적이고, 독특하고 배타적으로 쿠바적인 것이었다." 이것이 그가 "언제든지 필요한 순간이 온다면" 죽겠다고 맹세한 혁명의 모습이었다.[3]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공산주의적 성향에 대해 추측했지만,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확실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4] 뉴욕 타임스 기자 태드 슐츠가 "비밀 공산주의자"라고 묘사했지만,[5] 카스트로의 전기 작가 조지 앤 게이어는 "시엔푸에고스가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낭만적인 혁명가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6] 피델 카스트로는 시엔푸에고스를 "순수한 혁명가의 영혼, 공산주의적 기질"이라고 묘사했지만, 그의 "낮은 정치적 수준" 때문에 지휘권에서 제외되었을 수도 있다고 추측하기도 했다.[7] 다른 사람들은 그를 반공주의자라고 주장하거나 중립적인 용어로 언급했다.[8] 일각에서는 그의 형 오스마니 시엔푸에고스의 영향을 지적하는데, 그는 공산주의자였다.[9]

스페인 아나키스트의 아들인 그는,[10] 국제 아나키스트 운동 내 많은 사람들이 시엔푸에고스 자신도 아나키스트였다고 주장했다. 쿠바 정부는 국제적인 지지를 얻기 위해 그의 자유주의적 자격을 부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쿠바계 미국인 역사가 프랭크 페르난데스는 이러한 묘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시엔푸에고스가 쿠바 아나키스트 운동에 참여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4. 성격

사뮤엘 파버에 따르면, 시엔푸에고스는 "유머 감각, 춤과 야구에 대한 큰 관심, 잘생긴 외모, 여성에 대한 사랑, 그리고 전반적인 쾌락주의(''삶의 기쁨'')를 지닌 전형적인 쿠바 남성 도시민"이었다.[1] 휴 토머스는 시엔푸에고스를 "열린 마음과 쾌활한 태도, 따뜻한 미소로 카스트로 자신만큼이나 인기 있는 인물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고 평가했다.[2] 로버트 E. 퀴크는 "시엔푸에고스의 느긋하고 친근한 태도와 구약성서 시대 수염은 7월 26일 운동 지도자의 이미지와 대조되는 대중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냈다"고 평가했다.[3]

카밀로 시엔푸에고스가 스테트슨 모자를 쓰고 수염을 기른 채 로베르토 파네케와 로날도 아벨로와 함께 서 있는 모습
로베르토 A. 파네케(왼쪽), 카밀로 시엔푸에고스(가운데), 로날도 아벨로(오른쪽)


1959년 1월 콜롬비아 캠프에서 시엔푸에고스를 만났던 얼 E. T. 스미스 미국 대사는 그를 "예의 바르지만 초연한" 사람으로 평가했다.[4] 스미스의 후임인 필립 본살은 "시엔푸에고스는 쾌활하고 솔직했다. 그는 인재의 지도자로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했지만 권력 행사에 대한 압도적인 욕구는 없었다. 그는 쾌락과 화려한 삶을 좋아했다. 그는 그의 더욱 금욕적인 혁명 동지들에 의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우정과 관계에 대한 기호를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5] 반면 영국 대사 레이세스터 콜트만은 "카밀로의 금욕적인 모습, 검은 수염, 부드럽고 위엄 있는 태도는 그에게 카스트로보다 더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을 주었다"고 묘사했다.[6]

재무장관 라울 치바스는 그를 "항상 총을 가지고 노는 아이 같은 사람"이라고 묘사했고,[7] 그의 후임인 루포 로페스-프레스케는 그를 "쾌활하고, 태평하고, 모험심 많은 사람"이라고 묘사했다.[8] ''보헤미아'' 신문은 그를 로빈슨 크루소에 비유하기도 했다.[9] 시엔푸에고스의 "무모한 성격"은 종종 게바라의 "엄격함"과 대조되었지만, 두 사람은 혁명 지도부에 합류한 후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10]

5. 유산

체 게바라는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와 절친한 사이였으며, 시엔푸에고스 사후 태어난 자신의 아들 이름을 카밀로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카밀로'라고 지었다.[10] 체 게바라는 1961년 저서 ''게릴라전''을 시엔푸에고스에게 헌정하기도 했다.[10]

혁명 이후 대부분의 정당은 자발적으로 해산하여 "새로운 정치 질서"를 위한 길을 열었다. 시엔푸에고스는 인민사회당을 합법화했으며, 체 게바라는 시엔푸에고스의 결정을 지지했다. 시엔푸에고스는 그의 형제 오스마니 시엔푸에고스(Osmany Cienfuegos)에게 쿠바 문맹퇴치 운동을 감독할 혁명무장군의 문화부 설립을 요청하기도 했다.

혁명 승리 후, 시엔푸에고스는 정부 공식 직책을 맡지 않고 아바나의 야간 유흥을 즐기는 등 "대중의 총아"로 인기를 누렸다. 체 게바라의 가족이 아르헨티나에서 그를 방문할 수 있도록 무료 항공편을 ஏற்ப하기도 했고, 체 게바라와 알레이다 마르치(Aleida March)의 결혼 피로연에 럼주를 가져와 흥을 돋우기도 했다.

몬카다 병영 공격 기념일에 혁명 정부는 혁명 광장(Plaza de la Revolución)에서 대규모 시위를 열고 군사 퍼레이드를 거행했다. 그날 밤 라티노아메리카노 경기장(Estadio Latinoamericano)에서 시엔푸에고스와 카스트로는 "로스 바르부도스"(수염 난 사람들es)라는 팀으로 야구 경기를 했다. 야구는 혁명 이후 쿠바 문화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시엔푸에고스 사후, 그의 형 오스마니 시엔푸에고스(Osmany Cienfuegos)는 공공사업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1966년 2월까지 재직했다. 이후 공산당 외교 관계 위원회 위원장, 쿠바 공산당 중앙위원회(Central Committee of the Communist Party of Cuba) 위원, 국무원 위원, 각료회의 서기를 역임했다.

5. 1. 대중적 인기와 추모

카밀로 시엔푸에고스는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와 함께 쿠바 혁명의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다.[10] 쿠바의 20페소 지폐와 현재는 단종된 쿠바 전환 페소 20센트 동전에는 그의 얼굴이 새겨져 있으며, 청년 공산주의자 연맹 로고에도 그의 얼굴이 사용되고 있다. 시엔푸에고스와 절친했던 체 게바라는 아들의 이름을 카밀로라고 지어 그를 추모했다.

하바나 건물에 있는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기념비.
쿠바 통신부(Ministerio de Comunicaciones (Cuba)) 건물 외벽에 새겨진 시엔푸에고스의 강철 윤곽선 (2011)


매년 10월 28일, 쿠바 어린이들은 시엔푸에고스를 기리며 바다나 강에 꽃을 던진다. 이는 그의 실종 소식을 듣고 쿠바인들이 바다에 꽃을 던졌던 추모 행위를 재현한 것이다.[2] 2009년 그의 사망 50주기에는 혁명 광장의 Ministerio de Comunicaciones (Cuba)es 건물에 그의 얼굴 윤곽과 "''Vas bien, Fidel''"(잘하고 있어요, 피델)이라는 문구가 새겨졌다.[3]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의 얼굴이 새겨진 훈장 사진
시엔푸에고스 훈장


혁명 이후 쿠바의 많은 거리와 건물들은 시엔푸에고스를 포함한 혁명 영웅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산타 크루스 델 노르테 시의 "허시(Hershey)" 마을은 카밀로 시엔푸에고스로 개명되었다.[4] 야구아하이(Yaguajay)에는 시엔푸에고스 박물관이 건립되었으며, 그의 대형 동상이 박물관 앞에 서 있다.[5]

1960년 7월, 피델 카스트로는 시에라마에스트라(Sierra Maestra) 산맥의 농민 아이들을 위한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산악 기숙학교를 설립했다. 1966년에는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군사학교 시스템이 설립되어 11세에서 17세 사이의 학생들에게 군사 교육을 제공했다. 마탄사스 대학교 또한 "카밀로 시엔푸에고스"라는 이름을 사용한다.[6]

1979년 12월 10일, 쿠바 정부는 사회주의 공훈 훈장인 시엔푸에고스 훈장(Order of Cienfuegos)을 제정했다.[7]

5. 2. 의혹과 논란

카스트로의 권력 강화와 정부 내 인민사회당의 역할 증대는 혁명군 내 일부 장교들의 우려를 불러일으켰다.[2] 카마구에이 주 지휘관인 우베르 마토스는 시엔푸에고스에게 자신의 우려를 전했고, 시엔푸에고스는 상황을 조사하겠다고 약속했다.[3]

카밀로 시엔푸에고스가 체포되었지만 수갑을 채우지 않은 우베르 마토스 앞을 걸어가는 모습
시엔푸에고스가 우베르 마토스를 체포하는 모습


1959년 10월, 라울 카스트로는 혁명무장군 장관으로 승진했다.[4] 이는 이전에 그의 상관이었던 시엔푸에고스를 공식적으로 강등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5] 이로 인해 우베르 마토스는 사임했고,[6] 피델 카스트로를 "혁명을 매장하는 자"라고 비난했다.[7] 피델은 마토스를 반역죄로 공개적으로 규탄하며 응수했다.[8] 시엔푸에고스는 게바라오스발도 도르티코스 대통령과 함께 카스트로의 마토스 규탄이 실수였다고 생각하여 피델을 설득하여 기소 과정에서 관용을 베풀도록 하려고 했다.[9] 라울 카스트로가 시엔푸에고스에게 마토스 체포를 명령했을 때, 그는 처음에는 거절했고, 피델이 직접 명령했을 때에만 마지못해 명령을 수락했다.[10]

피델은 시엔푸에고스를 카마구에이로 파견했고, 그곳에서 그는 마토스의 부대가 여전히 그들의 지휘관에게 충성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마토스는 그의 장교들에게 정부에 대한 음모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시엔푸에고스의 도착을 존중하는 태도로 대하라고 명령했지만, 그들은 대신 대거 사임했다. 시엔푸에고스는 저항 없이 마토스와 그의 동료 반체제 인사들을 체포했고, 그의 전 동지에게 수갑을 채우지 않고 언론 앞에서 그와 나란히 걸었다. 그런 다음 마토스는 아바나로 압송되었다. 시엔푸에고스는 마토스의 지휘권을 인계받기 위해 카마구에이에 남았고, 그 주의 무장군을 완전히 재편성하는 감독을 맡았다.

시엔푸에고스가 실종된 직후, 많은 사람들이 그 사건에 대해 추측하기 시작했고, 일부는 불법 행위를 의심하기도 했다. 시엔푸에고스의 비행기 조종사는 경험이 부족했고, 정부는 비행기가 돌풍에 의해 추락했다고 주장했지만, 그날의 날씨는 실제로 비행에 적합한 맑은 날씨였다. 그의 비행기가 비행하던 지역은 레이더에 포착되었을 것이다. 시엔푸에고스의 비행기가 이륙한 기지의 기장인 로베르토 데 카르데나스는 비행기의 운명이 계획된 것이었다고 주장하며, 아무도 비행기 안에 시엔푸에고스를 보지 못했고, 기지의 다른 사람들은 살해당하거나 제압당했다고 주장했다.

Raúl Castro wearing his 26 July Movement uniform
라울 카스트로, 1959년


일부는 그가 라이벌인 라울 카스트로에 의해 암살당했다고 주장했다. 이 가설을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는 우베르 마토스 자신도 포함되었는데, 그는 자신의 체포와 카밀로의 실종이 관련되어 있다고 확신했다. 카를로스 프랑키는 시엔푸에고스의 안전을 책임지도록 라울 카스트로가 임명한 정보요원 오스발도 산체스를 의심했다. 다른 사람들은 피델 카스트로 자신이 시엔푸에고스의 암살을 지시했다고 의심했는데, 그것은 마토스를 체포하려는 그의 명백한 주저함과 관련이 있거나, 시엔푸에고스가 카스트로의 마음에 들 정도로 인기가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일부 회의론자들은 카스트로가 시엔푸에고스가 발견되었다고 거짓으로 발표하여 그에 대한 대중의 감정을 알아보려고 했다고 추측했다.

카스트로의 비평가들 중 일부는 그가 직접 시엔푸에고스를 죽이지는 않았지만, "피델의 특기 중 하나는 사람들을 죽이도록 보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엔푸에고스를 찾는 동안 카스트로와 함께 있었던 호세 파르도 야다는 나중에 "그는 [카스트로] 카밀로를 죽이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의 죽음을 분명히 느끼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체 게바라 자신은 시엔푸에고스의 실종에 카스트로 형제가 연루되었다고 의심한 적이 없었고, 그 후 수년 동안 피델에게 개인적으로 충성을 지켰다. 필립 본살 또한 카스트로 형제의 불법 행위 가능성을 고려한 적이 없었는데, 그는 "시엔푸에고스는 어느 누구에게도 위협이 되지 않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추측은 그의 비행기가 적대적인 항공기로 오인되어 쿠바 공군 조종사에 의해 격추되었다는 것이다. 시엔푸에고스가 죽음을 위장하고 미국으로 도망쳤다는 추측도 있는데, 일부는 탬파의 이보어 시티일 수도 있다고 추측한다.[1] 1960년, 하바나 출신의 전 간호사가 마이애미로 도망쳐 시엔푸에고스를 간호했다고 주장했지만, 나중에 "정신 이상"으로 선언되었다. 영국의 역사가 휴 토마스 자신은 시엔푸에고스 실종의 미스터리가 언젠가 풀릴지 여부를 추측했다.

6. 대중문화

2008년 영화 체에서 산티아고 카브레라가 시엔푸에고스 역을 연기했다.[8]

참조

[1] 웹사이트 The time a dead Cuban revolutionary was seen in Tampa https://www.tampabay[...] 2018-11-21
[2] 웹사이트 Who Killed Camilo Cienfuegos? https://www.miaminew[...] 2009-10-28
[3] 뉴스 Cienfuegos ya tiene su sitio junto al 'Che' en La Habana https://elpais.com/i[...] 2009-10-29
[4] 서적 Lonely Planet Cuba https://books.google[...] Lonely Planet Publications
[5] 서적 Museos de América Latina y el Caribe: Directorio Editorial José Martí
[6] 서적 Cuban Modernism: Mid-Century Architecture 1940–1970 Birkhäuser 2021
[7] 웹사이트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е награды Республики Куба https://sovet.gerald[...] 2003-09-30
[8] 뉴스 Saluting the Rebel Underneath the T-Shirt https://www.nytimes.[...] 2008-12-11
[9] 문서 CAMILO CIENFUEGOS by Carlos Franqui
[10] 뉴스인용 토막뉴스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59-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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